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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글의 한계를 넘기 위해 나름 노력하지만, 글에 멋을 넣는 것만은 가급적 자제한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도 쉽게 해석할 수 있을 만큼, 글을 간결하게 쓰려고 하고 있고, 거기에 영국에 살면서 배우는 서양식 비유를 이따금 첨가하는 편이다. 이것은 중학생 때부터 좋아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문체의 영향이 큰데, 최근에는 <먼 북소리>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소설가가 아닌 인간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났다. 그가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중심으로 머물던 중에 쓴 여행스케치들을 엮어 꾸민 책이다.

<먼 북소리>가 재미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언급하였듯, 하루키의 인간적인 모습과 성격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여행에세이에 매 순간 순간마다 느낀 기분과 상황을 솔직하고,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게다가 위트도 있다. 요새 나오는 허세 넘치는 여행기 책들은 예쁜 사진들로 감성보다 시각을 자극할 뿐인데, <먼 북소리>를 읽고 있으면 각 페이지가 묘사하는 장면들을 모두 선명하게 머리 속에 그려낼 수 있다. 폭풍우로 인해 무너져버린 그리스 스펫체스 섬의 어느 담벼락도, 오스트리아 여행중에 하루키의 자가용 차가 고장나 짜증을 내는 하루키 아내의 표정도, 심지어 유럽인(특히 이탈리아인) 특유의 사고방식에 불만이 가득하여 구시렁구시렁하는 하루키의 얼굴까지도...

또한, 2006년 여름에 이탈리아 한 나라만을 한달 보름간 홀로 여행한 나로서는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그 당시의 기억을 곱씹어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하루키가 20년 전, 나와 같은 일을 경험하고, 같은 것을 느꼈다는 점이 신기하여 마치 잘 맞는 사람과 박수 치며 수다를 떨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루키 아저씨는 프라스카티의 한 노천 식당에서 포르게타가 들어간 빵을 안주삼아 와인을 마셔보신 적은 없나보죠?'라고 묻고 싶었을 만큼 말이다. (프라스카티는 로마 근교에 있는 소도시로 와인이 유명하고, 포르게타는 이탈리아의 서민들이 즐겨 먹는 돼지 수육 같은 음식이다)

다만, 그리스와 타 지역에 비해 이탈리아와 이탈리아인들을 너무 나쁘게 표현한 점은 아쉽다. 개인적으로 피아트의 친퀘첸토라는 이탈리아산 차를 무척 갖고 싶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이탈리아산 차를 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내가 여행한 시점과 20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다소 감정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찌 보면 그런 점까지 하루키는 의도했는 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에게 연민까지 느끼게 되었으니까... 나 또한 외모, 성격, 정서, 문화, 배경 모든 면에서 이탈리아인보다 일본인에 훨씬 가까운 한국인이기에, 게다가 영국에서 외국인으로서 너무나도 많은 고충을 겪어왔기에 '하루키 아저씨'의 불만과 분노를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이탈리아에 대한 편견을 조금만 덜 심어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한동안 떠나지 못하여 생긴 여행에 대한 욕망과 갈증을 충분히 해소시켜주었으니, 여행에세이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 대리만족 측면에서 아주 훌륭한 책임에 틀림 없다. 페이지수가 600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한국어 번역서는 500페이지),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20년 전 여행한 하루키 아저씨처럼, 20년 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행복한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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